총무 양상옥

시인이자 학자로서 일생을 마친 가람과 난초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가람이 난을 얼마나 사랑하였던 것인가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난초에 대한 사랑은 고아한 풍격(風格)속에서 새로운 향기를 찾으려 했던 시조시인으로서의 노력과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람의 시조를 논의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난이 그 작품세계를 해명하는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가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4편 7수로 된 연작시조 "난초"를 통하여 가람의 시속에 살아 있는 난을 감상해 보자.

난초1
한 손에 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난초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젖는다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난초 향기는 물밀듯 밀어오다.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난초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외로 돌아앉아 冊을 앞에 놓아두고
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난초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 받아 사느니라.

난초1
아무런 기약도 없이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광경의 신선함을 노래하고 있다. 종장에 이르러 그 모습을 드러낸 난초는 중장의 <드는 2볕> <서늘한 바람> 의 조화로움 속에서 피어나 책과 더불어 사는 작가와의 자연스러운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난초2
1편에서 개화를 예시하던 <바람과 볕>은 연약한 신아를 강하게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는 <휘젓는 바람>과 발틈 사이로 비쳐 드는 <산듯한 아침볕>으로 변하여 이윽고 건실한 난이 되어 청아한 향을 빚어낸다. 난에 대한 작가의 안쓰러움과 지극함이 드러나 있다.

난초3

지루하고 외로운 가운데 꽃까지 지는 상황에서 이 모든 삶이 다시 피는 한 대의 꽃으로 인하여 새롭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온 종일 내리는 <비>는 고적한 <나의 마음>의 원인이기도 하나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활력소이다. 둘째 수는 작가의 내면과 한 송이 꽃을 피워 낸 난과의 공생적인 교감이 나누어지고 있다.

난초4
4편은 난초의 전편을 대표하고 있다. 강하면서 부드러운 난잎, 곧은 화경과 그 끝에 매달린 꽃, 자주색과 흰색의 대비, 첫 수가 난의 외형을 말한다면 둘째 수는 난초의 내면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온갖 식물들이 흙에 뿌리를 박고 있음에 반하여, 난은 깨끗한 모래에 뿌리를 서려 두고 있어 세상 사람들이 영욕의 늪에서 몸과 마음을 더럽히고 있을 때, 고결한 정신세계를 굳건히 지키고자 했던 작가와 같이 한껏 잘 어우러지고 있다.

가람의 "난초"는 <볕>과 <바람>과 <비>의 조화로움 속에서 작품 안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 시상을 털어 버리려 서재를 나와 베란다의 좁은 공간에 빼곡이 찬 난들을 둘러본다. 일조량과 통풍과 물주기 세 가지만 잘하면 건실한 뿌리와 빼어난 잎새, 청아한 꽃을 기대할 수 있다던 선배의 얼굴과 고교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늙수그레한 시골 할아버지 풍의 가람의 모습이 겹쳐진다. 가람의 시정신에 난초가 심어져 있듯이 난실이 아닌 우리의 마음속에 난초의 정신을 심을 수 있을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