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 양 상 옥

군 동기들과 포커를 하는데 손에 쥔 낱장들이 모두 난잎이다. 엄지에 힘을 주고 심혈을 기울여 바짝 쬐어본다. 아.... 중투! 배골에 뚜렷한 연녹색의 줄이 세로로 기부까지 들어있는 감중투가 아닌가?
감중투다! 감중투!! 목청껏 외쳐 본다.중투가 뭐예요? 흔들어 깨우는 마누라 손끝에 소스라쳐 일어났다. 몇 시지? 새벽 두시! 딸애를 깨웠다. 예전 같으면 토끼처럼 큰 눈을 뜨고 따라 나설 애가 잠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 정신을 차리지 못 한다. 쇼파 위에 밤사이 가지런히 정리해둔 옷가지와 배낭 장갑...들이 꼼꼼한 마누라의 성격을 보여주며 나에게 산행을 재촉한다.
걱정 스레 흔드는 아내의 손짓을 뒤로 하고 난원을 향하여 악셀레타를 밟았다. 어둠에 덮인 심야의 자유로를 달리는 기분은 마치 말을 타고 드넓은 황야를 달리는 서부총잡이의 외로움이라고나 할까? 온 몸에 묻어있는 설깬 잠을 차창 밖으로 날려 보내며 상큼한 밤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켜 본다. 새벽두시가 훨씬 지났는데도 서울의 밤은 취객들의 흔들림 속에 깨어 있었다. 난원에 도착하니 웅성거리는 검은 그림자들이 "어이! 김 산반씨! 안녕하슈?" "성 민출씨! 오늘은 한 건해야지." 오랜 산채를 통하여 얻어진 별명과 덕담으로 정을 나누며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새벽 여섯시! 송백식당을 앞에 두고 차가 멈췄다. 미명이 동편하늘을 물들이고 앞 산 자락에 정읍병원이 새벽 안개속에서 허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푸석 푸석한 얼굴들, 잠에 찌들린 회원들이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식당 안으로 밀려 들어간다. 퉁명스러운 식당아줌마의 모습과는 달리 구수한 된장찌게 냄새와 맛갈스러운 찬들이 식욕을 돋우는지 회원들의 숟가락소리는 요란하기만하다.
저 산에서 중투가 나왔다지, 저 산에선 사피가 나왔어, 그래, 그때, 꿩 알도 주웠었지. 차창너머로 보이는 산굽이마다 회원들의 추억이 서려 있었다. 드디어 하차! 지금부터 시작이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이 사장이 벌써 고개를 넘으며 손짓을 한다. 윤 사장이 그 쪽은 산반이 나오기도 힘들 것 같은데... 진로를 바꾸잖다.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 우리는 이사장님을 따라 고개를 너머 잔솔이 많은 곳을 택하여 솔밭에 들어섰다. 첫 발을 딛을 때부터 난 밭이다. 자태도 소담스럽고 대주보다는 2, 3년되는 생강근들이 누런 잔솔잎에 청초함을 한껏 뽑내고 있었다. 오늘 하루동안은 한 눈에 보이는 골짜기만 뒤져보기로 하고 모두들 자세를 낮추어 탐란의 기본자세로 빠져 들었다.
10분도 채 안 돼서 "야호! 이리 와봐, 이리 와보라니깐!" 윤사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우리가 오기를 재촉한다. 가서 보니 노오란 무늬가 선명하나 한 잎에만 들어 있어 호반이라 하기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윤 사장은 조금만 끼가 있는 것을 발견하면 일행을 불러 모아 이를 확인시킨다. "잎끝을 봐. 자세히 보란 말이야. 뭔가 보이지? 안보여? 자세히 좀 봐. 뭐 다른거 있지?" 신통치 않은 반응에도 나름대로 끼를 확인시키려는 열성이 대단하다. 그런 덕에 심심 찮게 대작을 발견하는 윤 사장이다. 그러나, 지금껏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와 주질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남 달리 기대가 크다. 감중투의 꿈을 꾸었으니 말이다... 그래, 오늘은 꼬옥 한 건을 하고야 말리라는 마음에 쥐잡는 고양이 발걸음으로 솔밭숲을 기고 또 기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드니 앞서 가던 이사장이 해맑은 미소로 담배를 권했다. "에라.모르겠다. 담배를 입에 물고 그냥 그 자리에 드러 누웠다. 모자에는 이름모를 풀씨들이 엉켜있고 손끝에는 가시가 박혔는지 욱신거린다. 네시간이 넘게 가시덤불을 헤멨지만 기대할만한 난은 찾지 못했다. 길게 품어 내는 연기 속에 감중투의 꿈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을 달래주듯이 솔잎 사이로 아른 거리는 햇살은 따사롭기만 하다. 어느 사이 셋이다. 매번 만나는 사이지만 난에 대해서는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수많은 용어들이 대화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꽃대 관리' '벌브' '전시회' '통풍' '시비' '채광'...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윤사장의 말에 따라 자리를 옮겨 도시락을 펼쳤다. 묘지의 잔디밭은 언제 앉아도 포근하다. 포만감속에서 커피를 마실 때 문득 꿈속의 감중투가 생각났다.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선명한 무늬가 눈에 선하다. "우리 고사 지낼까요?" 갑작스런 내 제안에 "죠오치!" 모두 흔쾌히 동의하면서 고사준비를 위한 순간의 행동들이 나름대로 재빠르다. 채란통을 하려고 가져온 플라스틱 음료통이 순식간에 술잔이 되어서 이사장님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자! 따라 봐요." "어.어! 조금, 조금만 따라야지." "뭘요. 가~득 따라야지 산신령이 좋은 난을 주시겠죠." 반 병을 족히 따라 놓을 때 윤 사장은 벌써 닭다리를 제물로 올려 놓고 있었다. 큰 절을 올리면서 "감중투 하나만 부탁합니다. 감중투..감중투.."를 속으로 몇 차례나 읊조렸는지 모른다. 의식(?)을 끝내자마자 일행은 세뱃돈을 기다리는 어린 마음이 되어 숲속을 다시 헤멨다. 그러나 전에는 보이지 않던 영지만 눈에 띌뿐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지금 시각 한시 삼십분, 두시에 모이기로 했으니 삼십분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고사를 지내서 인지 남은 삼십분에 대한 기대는 너무나도 크다.
이사장과 지근거리에서 난잎을 뒤지고 있는데 아래쪽 골짜기에서 윤사장이 또 소리를 지른다. "야호! 이리와 봐. 이리와 보라니깐! 형님! 어이! 양선생!" 목소리에 힘이 주어진걸 보니 무언가 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촉이 심했지만 남은 시간이 아까워서 허리를 굽힌 체로 난잎을 보며 소리나는 쪽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웬걸, 늦 가을 누우런 감들이 눈앞에 펼쳐 있었다. 배낭에 걸터 앉아서 감을 한움큼 베어 물고, 웃고 있는 윤사장의 넉살과 천연덕스러움에 어울려 "아니! 이 깊은 산속에 왠 감!" 하나씩 따서 베어 물었다. 녹아 드는 단맛이 산속에서의 피곤함을 모두 가시게 해 주었다. 견물생심이라던가 우리는 다른 회원들이 생각나서 몇 개씩 더 따서 배낭에 넣으면서 감서리의 짜릿한 맛을 즐기려는 순간 "여보 씨요이~ 거기 이쓰시요이~" 산아래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것 같더니 번개처럼 숲을 헤치고 한 청년이 우리 앞에 산처럼 크게 다가왔다. "이짓이 뭔 지시요잉~? 옴서 감서 다 따가면 우리는 뭐 먹고 살겄쏘? 난캐러 다닌 담서 못할 짓만 하는 갑네." 갑씨다아~ 아 가요, 파출소로 가잔 말이여!
난감하다! 모두들 손에는 먹다 남은 주먹만한 단감이 또 발아래는 회원수가 족히 될 단감들이 반쯤 열린 배낭에서 비웃듯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거냐? 그동안 남들이 따간 감까지 모두 배상하라는 등 분에 이기지 못한 청년의 항의가 망치처럼 가슴을 ?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모처럼 산속에 오고 보니 옛 동심에 젖어 앞뒤 생각없이 감을 땄다는 등 나름대로 변명하고 그를 달래는 내 모습이 몹시 작고 부끄러웠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청년은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딴 감을 어쩔 거시요. 그냥 가지고 갓 씨요!" 하고 순박한 시골정을 보여주었다. 고마워서 얼마간의 돈을 주려 했으나 청년은 단호이 뿌리쳤다. 우리는 던지듯 돈을 주고 나서 허둥대며 자리를 떴다.
오후 두시다. 이제 산채는 끝이 났다. 기대했던 감중투는 누우런 황감의 망신으로 끝나고 말았다. 골짜기를 내려 올 때 이사장이 스틱을 땅에 내리치며 하는 말이 걸작이다. "글쎄, 술을 너무 많이 따랐다니까. 산신령 이양반, 주량이 약한가봐. 취했어! 누우런건 좋았는데 난하고 감도 구분못하고 말이야." 망신과 쑥스러움을 털어내려는 일행의 웃음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